손용석 한국일보 상무, 신문협회 광고협의회 회장 연임…부회장에 김종헌 매일신문 광고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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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용석 한국일보 상무, 신문협회 광고협의회 회장 연임…부회장에 김종헌 매일신문 광고국장

손용석 한국일보 상무, 신문협회 광고협의회 회장 연임…부회장에 김종헌 매일신문 광고국장

입력 2024-12-20 09:36:08 수정 2024-12-20 09:38:08

한국신문협회 산하 광고협의회는 지난 19일 정기 이사회를 열고 손용석 현 회장을 연임하기로 결정했다. 이번 선임으로 손 회장의 임기는 앞으로 2년간 이어진다.

손 회장은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일보에 입사한 뒤 사진협회 회장, 멀티미디어부장, AD전략국장 등을 역임했다. 이후 광고협의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며 국내 신문광고의 발전에 기여해 왔다.

광고협의회는 신문광고의 발전과 회원사의 공동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1971년 창립된 단체로, 전국 주요 41개 신문사의 광고 담당 임원 및 국장들로 구성돼 있다.

한편, 이번 이사회에서 새로운 임원진 구성도 이루어졌다. 주요 임원으로는 박문규 경향신문 상무, 고기정 동아일보 AD본부장, 김종헌 매일신문 광고국장이 부회장으로 선임됐다. 또한 권상진 내일신문 이사, 이민종 문화일보 AD커뮤니케이션국장, 김홍길 서울경제 마케팅국장 등 다수의 이사와 함께 구홍현 매일경제 광고마케팅국장이 감사로 임명됐다.

광고협의회는 앞으로도 신문광고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협력과 발전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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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큰 폭으로 감소하는 신문구독률 때문에 광고수입이 줄어들고 있어서이다.

문화체육관광부 통계자료에 따르면 2011년 1조 7,092억 원에 달하던 신문광고는 2019년 들어서는 8,769억 원까지 떨어졌다고 나타났다. 몇 년 사이에 반 토막이 난 것이다.

그나마 언론사들이 유지되는 게 정부광고 덕분이다. 만약 공공기관이나 지자체, 정부 등이 광고를 하지 않는다면, 망하는 언론사가 수두룩할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언론사는 매년 증가 추이다. 2020년에는 등록된 언론사만 약 2만여 개에 달한다고 한다.

때문에 언론사마다 광고 수주 경쟁이 치열하다.

예전에는 마케팅 부서에서만 진행하던 광고 수주는 이제 보도국까지 동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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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기관 홍보담당자 입장에서 가 광고 부탁이 들어오면 바로 거절하기 매우 어렵다.

하지만 기관 예산이라는 것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부탁 들어온 광고를 모두 진행할 수는 없다.

언론담당에게 광고 요청이 들어오면 권한이 없다고 정중히 말하고 광고 담당자와 연결시켜주면 된다.

물론 같은 기관이기 때문에 완전의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광고담당자들은 들을 대할 때 언론담당자와는 조금 다른 스탠스를 취할 수 있다.

노련한 광고 담당자가 되기 위해서는 언론사의 기분을 상하지 않으면서 광고 요청을 거절하는 스킬이 필요하다.

돈으로 들은 관리하는 것은 하수 중에 하수다. 한번 광고로 기사를 만들어나, 안 좋은 기사를 막게 된다면 다음번에는 더 큰 요구를 하게 된다.

때문에 언론광고는 집행할 때 매우 신중하게 해야 한다. 우리는 돈이 그리 많지 않으니깐.
한정승인신문공고
지역에 있는 기관의 경우에는 언론광고와 관련해 어려움이 더 있다.

서울 쪽 언론사뿐 아니라 지역 언론까지 신경 써야 하기 때문이다.

정해진 예산안에서 집행해야 하는 언론광고 수량이 늘어가는 것이다.

LX한국국토정보공사에는 매년 간담회에서 솔직하게 돈이 많이 않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지역의 언론사들에게 규모와 상관없이 년 1회에 한해서 지원하겠다고 정리한 적도 있다.

그 이후에는 각 언론사별로 무리하게 광고를 요청하지 않고 나름대로 잘 꾸려가고 있다.

마이니치신문 전면 광고/사진=토요타 공동취재단
한정승인신문공고
"정의선 회장과 현대자동차 여러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토요다 아키오 토요타자동차 회장이 '2024 WRC'에서 함께 경쟁한 현대자동차를 응원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해당 소식은 엑스 등 SNS를 통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25일 자동차업계에 따르면 토요타는 아사히, 요미우리, 마이니치 등 10개 매체에 해당 광고를 실었다. 지난 21일부터 24일까지 일본 아이치현과 기후현에서 열린 2024 WRC 마지막 라운드를 끝으로 2024 WRC 시즌 드라이버·코드라이버 부문 우승을 달성한 현대차를 향한 응원이다. 제조사부문은 토요타가 챔피언을 차지했다.

해당 광고에는 일본어로 "최종전 랠리 재팬까지 챔피언을 걸고 경쟁할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팬 여러분께도 즐거운 랠리를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내년에도 좋은 승부를 겨룹시다"라고 쓰여 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토요다 아키오 토요타그룹 회장이 WRC 일본 랠리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현대차

앞서 지난 24일에는 토요다 아키오 토요타자동차 회장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2024 월드랠리챔피언십 일본 랠리'가 열린 일본 아이치현 토요타스타디움에서 만났다. 지난 10월27일 용인 에버랜드 스피드웨이에서의 회동 이후 한 달여 만이다. 아키오 회장과 정의선 회장은 이날 오전 WRC 경기장 밖 팀의 전용공간이 모여 있는 '서비스 파크'를 함께 둘러봤다.

아키오 회장은 서비스파크에서 한국 들과 만나 "2024 시즌 드라이버 챔피언은 현대월드랠리팀의 티에리 누빌이 차지했다. 기사 많이 써달라"며 "오늘 날씨 정말 좋은데 저희 응원하는 기사도 써달라"고 말했다.
한정승인신문공고
한국토요타자동차 관계자는 "아키오 회장은 아시아지역 모터스포츠 시장 활성화 위해 경제지에 전면 광고를 게재했다"며 "좋은 결과는 서로 격려하고 함께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고 했다.

1970년대 초 서울시가 강남 개발 계획을 거의 완성했지만 문제는 포화 상태에 이른 강북 인구를 어떻게 이주시키느냐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기반시설이 건설되지 않았고 학교도 없었다. 교통 사정은 말할 것도 없이 나빴다. 1972년 즈음 강북에서 강남으로 연결되는 한강 다리는 한남·잠실·영동대교 3개뿐이었다.

더욱이 전 세계에 불어닥친 불황으로 강남 개발은 정체 상태에 빠져 있었다. 강남 개발을 최초로 구상한 박정희 대통령은 "조금 늦더라도 강남을 이상적인 신도시로 만들라"고 지시한 터였지만 더 지체할 수 없었다.

우선 도로를 내고 집을 지어야 했다. 강남 개발을 촉진하고자 허허벌판이던 논현동에 공무원 아파트를 먼저 지어 공무원들을 거의 강제로 이주시켰다. 일부 공무원들은 도저히 살 수 없다며 강북으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이 아파트는 1994년 강남 최초로 재개발이 승인되어 신동아파밀리에 아파트가 돼 있다.

1972년 5월 서울시는 현 강남대로의 동쪽인 영동 2지구의 청담·신사·논현·학동 등에 직접 단독주택을 지어 분양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네모꼴의 한 블록마다 1~2개 단지씩 모두 10개 단지 753개동을 짓는 규모였다. 1차 분양 광고를 보면 단독주택의 모습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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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평 벽돌 기와집, 18평 단층 슬래브 주택, 20평 단층 슬래브 주택, 20평 테라스 하우스, 20평 2층 슬래브 주택 등으로 대지는 60~70평, 분양가는 261만~310만원이었다. 건축지는 대로변이 아니라 공사하기 쉽고 땅값이 저렴한 블록 중심부였다.

건축은 일사천리로 진행돼 단 6개월 만에 완공됐다. 사진은 1972년 12월 준공식 직전의 단독주택 단지 모습이다. 서울시는 동시에 도로를 포장하고 남산순환도로를 거쳐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버스 노선을 만들었다. 상하수도와 시장, 공원, 전화 등 기반시설도 건설했다. 준공식에는 박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참석했다. 그러나 완공 초기 모습을 보면 나무도 없는 황량한 언덕바지에 집이 들어섰고 도로는 포장이 끝나지 않아 황톳길이었다. 비가 오면 진흙에 발이 푹푹 빠질 수밖에 없었다. 블록 중앙에 지어진 시영주택들은 주변 개발을 위한 마중물, 즉 선도지구 격이었다. 예상대로 주택단지가 완성되자 그 주변으로 집과 상가들이 들어서 강남은 점차 시가지의 모습을 갖춰 나갔다. 당시 이런 형태의 개발을 '아메바형' 개발이라고 불렀다. 강남에서 최초로 분양한 이 단독주택들은 현재 대부분 빌라나 아파트 단지로 재건축되어 사라지고 없다.

1970년대 초만 하더라도 강북의 서울시민들은 개발이 덜 된 강남 이주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주택 건설에 이어 구자춘 서울시장이 강남 이주를 유도하기 위해 낸 아이디어가 명문 고교의 강남 이전이었다. 학교를 옮겨 놓으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따라올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시험제였던 당시 경기·서울·경기여고 등 일류고들은 모두 서울 종로구나 중구 등의 도심에 있었다.

서울시가 학교를 강제로 옮기려 하자 동문들과 재학생, 해외 동창생들까지 극렬하게 반대했다.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이었던 고 손정목씨는 경기고의 저항이 가장 심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옛 교사는 허물지 않고 도서관으로 단장한다는 확약을 하고서야 1972년 10월 삼성동 이전을 발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옛 경기고 부지 면적은 1만1000평이었는데 3배나 되는 3만2250평을 제공하는 조건도 추가했다.

이렇게 해서 사실상 서울시의 강요에 못 이겨 강남으로 옮긴 고교가 경기·서울고 등 공립고와 휘문고 등 사립고였다.

그때만 해도 억지로 이전한 학교가 지금 학부모나 학생들이 선호하는 강남 8학군 학교가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면 경복·용산·경동·중앙고 등은 강북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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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고는 목동으로 갔고 마포고는 등촌동으로 옮겼지만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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